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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 초지일관 지조를 지킨 의사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 정보 제공
제목 구연영 - 초지일관 지조를 지킨 의사
구연영(具然英)은 민족운동가이며 종교인이다. 1895년 을미의병 때 이천의병을 이끌었고, 비폭력 구국운동으로 방향을 바꾸면서부터는 애국계몽운동가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등 노골적인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그해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이어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직접 중앙관직을 차지하는 등 대한제국의 숨통을 조여 오다 끝내 1910년에 병합조약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이 시기에 침략행위에 맞서 우리 민족 또한 온 힘을 다해 항거하였다. 일제침략기 민족운동은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의병운동이며 하나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의병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무력저항의 방식을 택하여 총격전을 벌이며 나라를 지키고자 한 운동이고, 애국계몽운동은 국민들의 실력을 키워 나라를 지키자는 보다 온건한 방법의 민족운동이었다.

이러한 항일민족운동은 서울을 구심점으로 하여 움직이곤 했으나 더러는 지방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는데, 이천지역도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흐름에 동참하였기에 지역의 자존심을 지켰다.

구연영 의사의 이천에서의 활동은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해 일어난 을미의병 발발 때부터이다. 이 시기 구연영은 김하락 등 몇 명의 동지와 함께 이천에서 의병들을 규합하였다. 이때 화포군 1,000여 명이 모인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고 중군장(中軍將)이 된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인 이천에서 의병의 불길이 오르자 불안을 느낀 일본군 수비대는 100명의 병력을 급파하여 이천의병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이천의병은 일본군이 넘어오는 광현고개에서 복병계로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래서 일본군수비대와의 첫 전투는 1896년 1월 넓고개[廣峴]에서 벌어지게 된다. 이 전투에서 의병이 대승을 거두었고, 패주하는 적으로부터 무기와 군량을 빼앗아 이천으로 당당히 개선하였다. 같은 해 2월 13일 일본군 수비대의 반격이 시작되었는데 4개 대대로 나누어 오던 적과 이현(梨峴)에서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는 엄동설한인데다가 때마침 바람을 마주하고 싸우는 형세이다 보니 아군이 패배하였고, 장졸들은 모두 흩어졌다. 구연영 중군장도 여주로 피신하였지만 곧바로 동지들과 함께 다시 군사를 모으고 박주영을 대장으로 하는 이천수창의소를 재정비하였다. 이때 모여든 장졸들이 1,6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대병력으로 우선 광주 남한산성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남한산성에 진을 친 이천의진은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 연합군의 1차 공격을 최선을 다해 막아내고 퇴진시켰다. 그러나 이천의진 지도자 일부가 관군의 회유에 변심하여 병사들이 쉬고 있는 한밤중에 남한산성 문을 열어 주었고, 몰려든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전하여 흩어져 도주하고 만다. 구연영은 이번에도 동지들과 함께 의병들을 다시 수습하고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김하락의 고향인 안동으로 부대를 옮기기로 한다. 이때 구연영도 함께 떠났지만 이동 도중 김하락 대장과의 의견 충돌로 인하여 30여 명의 이천 출신 의병들과 다시 이천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구연영 의사의 애국활동에 있어서 무력에 의존한 활동은 이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때부터 구연영 의사의 활동은 비폭력 운동으로 바뀐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1899년 마장면에 있는 덕들[德坪]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이천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다니며 전도에 힘쓰고 아울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전도사가 된 구연영은 1905년에 이천지역의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이 되었어도 기울어가는 나라를 외면할 수는 없었으며 어떻게든지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기독교를 발판으로 비폭력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국민 정신계몽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로 신(信)·망(望)·애(愛)를 강령으로 하는 구국회(救國會)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회원분포가 이천은 물론 여주·안성 등지까지 퍼져 있었다.

구국회 회원들 대부분은 의병시절부터 구연영과 함께 분투했던 동지들이었다. 한편,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1907년에 이르러 고종을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직접 대한제국 고위관직을 차지하였고, 이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년1895 때처럼 의병이 발발했는데, 1907년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의 불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게 타올랐다. 해산된 군인들이 직접 의병에 합류하였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정미조약이 체결되고 군대해산으로 의병활동이 확산되어가던 이때 이천·여주 지역도 그 어느 지역보다도 의병활동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구연영의 구국회도 이천과 인근 지역은 물론 강원지역까지 순회하면서 군중집회를 열어 민중을 계몽하고 일제와 일제의 앞잡이 일진회를 규탄하였으며, 정미7조약의 철회를 촉구하였다. 국민들에게 단결을 호소했으며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시장의 철시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연영의 이러한 활동이 일진회와 일제에 달가울 리 없었다. “경성(京城) 동편 10여 군(郡)에는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배일자(排日者)도 근절될 것이다”라고 의견을 모은 일진회원들이 구연영을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군 수비대가 출통했음을 안 구국회에서는 구연영에게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그는 태연히 있다가 아들 구정서와 함께 체포되어 이천경찰서당시 일본군 수비대에 수감되었고 심한 취조를 받았다. 일본군은 구연영 부자를 나란히 포박해 놓고 동지들을 대라고 모진 고문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구연영은 “무슨 동지들을 대라고 한단 말이냐? 일진회 회원을 뺀 모든 백성이 나의 동지다”라고 태연한 자세로 저들을 질책하였다. 구연영 부자가 혹독한 악행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자 저들은 결국 이천 읍내 시장터에서 두 부자를 총살하였다.

구연영 의사는 이천에서 출생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일생 중요한 시기를 이천에서 보냈으며, 조국을 구하기 위한 의병활동으로 그리고 일제의 침략상을 알리는 민중계몽 활동에 헌신하였다. 의병활동을 이끌면서 구국활동에 참여한 이래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다 결국 일제의 총칼에 희생될 때까지 그의 의(義)는 일관성 있게 나타났으며 모진 고문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은 우리 고장의 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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