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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재연 - 살신보국의 무장
이천이 낳은 대표적인 근대 인물 어재연(魚在淵) 장군은 조선 후기 무장으로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증조할아버지부터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무관가문이었다. 장군의 증조할아버지 어유남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헌대부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어석명도 무과에 급제하여 인동부사를 지냈다. 어재연은 1823년(순조 23) 어용인(魚用仁)의 장남으로 이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가가 율면 산성리에 보존되어 있어 그의 일대기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장군은 1841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급제이전에는 산성리 현 고택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생가 주변에 있는 산세가 바로 무과시험을 준비하는데 좋은 환경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벼슬은 대구영장을 거쳐 광양현감・평양중군(平壤中軍)・풍천부사직 등을 역임하였으며, 1866년(고종 3)에는 공충도(公忠道),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두 차례의 외환에 참여하였는데, 하나는 1866년 병인양요이고 또 하나는 1871년 신미양요이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으로 대표되는 두 사건은 모두 강화도를 중심으로 발발하였다. 우선 병인양요는 프랑스의 내침을 막아낸 것으로 유명한데, 프랑스 로즈함대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침략해온 사건이다. 당시 프랑스는 통상요구뿐 아니라 1866년 병인박해 사건 때 프랑스 신부가 살해된 사실에 대한 보복을 조선침략의 또 다른 명분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집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서양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과 같다”라는 논리로 결사항전을 주문했고, 이는 병인양요 당시 병사들의 사생결단 저항으로 나타났다. 어재연도 우선봉(右先鋒)으로 병사를 이끌고 광성보(廣城堡)를 수비하였다.

이 후 장군은 함경도 회령부사로 전직하여 북쪽지방에 자주 출몰하는 비적들을 소탕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는데, 비적 소탕으로 국경지역에 있는 회령지방의 개시(開市)와 경원지방의 개시가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었다고 한다.

병인양요 발생 5년 후인 1871년 이번에는 미국의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바로 신미양요 사건이다. 사실 그 전인 1866년에 미국함대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목적으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다 평양 군민들의 화공을 받아 함대가 불타고 침몰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을 트집삼아 1871년 강화도에 침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록 많은 병사가 전사하는 등 피해는 컸지만 강화도 수비병은 사력을 다하여 미 해병대를 막아내었다. 당시 미 해병대는 로저스의 지휘 하에 강화도 광성보에 접근하였고, 그곳을 지키던 수비대장은 강화도 진무중군 어재연이었다. 어재연 장군은 동생 어재순과 600여 명의 군사로 항전하였는데, 실로 처절한 싸움이 전개되었다. 수자기(帥字旗), 장군기를 게양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항전 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군은 전원이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투혼을 발휘하던 그 모습이 미 해병대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어재연은 물론 그의 동생 어재순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충성심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두 전투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특히 이 중에서도 신미양요에서의 그의 모습은 애국의 표상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군사를 총지휘하는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애국함으로써 병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전장에서의 그의 죽음이 이를 말해준다. 이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다음과 같은 미국 측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조선군의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퇴각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 신미양요를 자신의 대외정책을 강화하는데 이용하였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통상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로 간주하며 백성들에게 서양세력을 경계할 것을 지시하였다.

어재연 장군은 이천이 낳은 무장으로서 조선 말 서구의 침략 등 어려운 시기에조국을 지켜낸 살신보국(殺身輔國)의 표상이다. 조정에서도 장군의 충성심과 기개를 높이 사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 삼군부 훈련원사를 수여하고 시호를 충장(忠壯)이라 하였으며 정문을 내려 치하하였다. 동생 어재순에게 역시 통정대부 이조참의를 증수하고 정문의 은전을 내렸는데, 이에 따라 충장사 입구에 세워진 정문을 쌍충문이라 불렀다.

어재연 장군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는 1984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12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3월 현재 후손 어용선이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생가는 19세기 초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을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뒤쪽으로 규모가 큰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광채 모두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건물의 질도 우수한편이다. 광채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도 이때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집 앞에 사방으로 개방된 바깥마당이 있고, ‘ㅡ’ 자형 사랑채가 바깥마당과 접해 있으며, 지붕의 형태는 우진각형이다.

한편, 강화도 불온면 덕성리에는 당시에 전사한 장군과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표충비가 세워져 있으며, 1973년에 생가 아래 우측에 충장사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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