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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망 - 국가에는 충(忠), 백성에게는 사랑을 실천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 정보 제공
제목 이홍망 - 국가에는 충(忠), 백성에게는 사랑을 실천
이홍망(李弘望)은 조선 중기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 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국가에는 충(忠), 백성에게는 선정을 베푼 유교정신에 충실했던 인물이다. 본관은 용인(龍仁)으로, 이천 입향조 이명효의 손(孫) 증 좌찬성 이양진의 아들로 백사면 도지리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였으며, 가난한 어린 시절 학업에 전념하여 급제하기 전 공부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었는데, 특히 잠을 쫓기 위하여 상투를 서까래에 매달고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향촌에 미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홍망이 급제한 것은 1601년(선조 34) 그의 나이 30세 되던 해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05년에는 증광문과에 을과 3인 중 한사람으로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간다. 이후 20여 년 간을 관료로서 봉사하는데 지평·정언·수찬을 거쳐 1622년(광해군 4) 외직인 함평현감이 되었다. 함평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고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임기가 끝나자 함평현 백성들이 쌀 300석을 비변사에 바치면서 그를 다시 현감으로 제수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즈음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군수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굳게 사양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관이 평하기를 “당시 수령들은 제수하는데 있어 모두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수탈을 일삼았는데, 홍망이 청렴하고 근신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청을 받았으니 백성들의 마음이 또한 감동적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늘 선정을 베풀었기에 이직하여 그곳을 떠날 때에는 그곳의 현민(縣民)들이 자원하여 송덕비를 세워줄 정도였다. 이홍망은 안변·연안·해주 등을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고 긴 세월 외직으로 나갔다가 1626년(인조 14) 형조참의로 제수되면서 조정으로 들어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국왕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는데 이때 왕을 호종하기도 하였다. 한편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화약이 성립된 뒤에 후금은 조선에 왕자를 볼모로 요구하였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원창군 이구를 인조의 왕자로 가장하여 신사(信使)로 심양에 보냈으며, 이홍망은 부사로 따라갔다. 이때 후금은 이홍망을 회유하려 국서의 내용을 트집 잡아 협박하고, 혹은 미녀와 술로써 회유하려 하였으나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의연하고 당당한 기개로 오히려 상대를 감동케 했다고 한다. 그는 이와 같은 태도로 임무를 수행했으며 인질로 잡혀있던 조선인 남녀 수백 명을 송환시켰다. 이때 돌아온 포로 가운데 황해도 해주 사람인 김굉인 형제는 훗날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그의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1636년 조선은 청과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바로 병자호란이다. 당시 이천의 집에 머물고 있던 차라 급히 왕을 호종하러 길을 나섰으나 광주 경안(慶安)에 이르자 적군이 길을 막고 있어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청과 조선이 화약을 한 후 이홍망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왕을 호종하지 않고 피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조는 공이 가난하여 거마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일축하고 오히려 동부승지를 제수하였다.

한편, 공은 일찍이 선대(先代) 광해군 재위 때 인목대비 폐비 여부로 논의가 분분했을 당시에도 헌납(獻納) 사간원 정5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강직한 성품이었기에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외직에 있을 때, 일곱 고을 수령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모두 송덕비가 남아 있다. 『이천읍지』에 인물로 이름이 올랐고, 묘는 백사면 모전리에 있다.

이홍망은 조선 유교에서 강조하는 선비의 표상이 아닐까 한다. 그는 청소년 시절 최선을 다해 학문에 전념하였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충심으로 임금과 국가에 충성하였으며, 외직에 거하면서는 백성을 사랑하여 송덕비로 추모된 인물이다.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이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남을 해치는데 앞장서거나 혹은 자신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공은 권력이나 높은 벼슬에 큰 욕심이 없었던 듯하다. 자신의 영달을 위한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기에 큰 환난에 휩싸이지 않았고 소신(所信)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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