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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 용기와 지혜로 국난을 극복한 외교의 귀재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 정보 제공
제목 서희 - 용기와 지혜로 국난을 극복한 외교의 귀재
이천에서 태어난 본토박이 이천인이며, 충군 애국의 모델인 장위공 서희(章威公 徐熙, 942~998)는 이천서씨(利川徐氏)로 호는 복천(福川)이다. 그의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逸)은 이천서씨의 시조로 신라 말 아간대부를 지냈으며,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80세에 서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아들 서필(徐弼)을 얻었다고 한다. 서필은 성품이 강직하고 총명한 사람으로 내의령을 지냈으며 고려 4대 임금 광종을 섬김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서희는 내의령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60년(광종 11) 18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면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광평원외랑(정6품)에 제수되었다. 문관이었던 서희는 972년 내의시랑 직에 있으면서 왕명으로 고려의 사신이 되어 송(宋)에 파견되었는데, 이때부터 외교가로서 명성을 이미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 때의 외교활동은 매우 비중 있는 것으로 10여 년 간 단절되어 있던 중국 정통왕조와의 관계회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일종의 조공형태를 띄고 있으나 그 결과가 주목되는 외교였음에 틀림없다. 서희는 이 외교에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되는데, 그가 사절로 다녀온 후 송과 고려가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송의 태조 조광윤은 서희의 인품을 가상하게 여겨 검교병부상서를 제수하였다고 한다.
이 후 서희는 고려 조정에서 승승장구하여 983년성종 2에는 상서좌승을 거쳐 군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직에 올랐다. 문관직에서 무관직의 성격을 띤 위치로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 동북아 국제정세를 잠시 살펴보면, 서쪽 바다 건너에는 당 왕조를 대신한 송이 있었고, 북쪽 옛 고구려 땅에는 유목민족으로 916년에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운 거란이 성장하고 있었다. 거란은 일찍이 차지한 송의 북쪽지역(연운 16주)에 대한 송의 반환요구를 거절하는 등 그 강대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차 송을 장악하고자 하는 거란은 남쪽의 고려가 단지 송과 친교할 뿐 자신들을 외면하는 것에 불만이었다. 또 장차 송을 공격하려면 송과 친교를 맺고 있는 배후의 고려를 먼저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993년 거란 장수 소항덕(소손녕, 당시 동경유수의 직을 갖고 있었음)은 8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를 상군사로, 서희를 중군사로, 최량을 하군사로 지명하여 북계에 머물고 있는 거란을 방어하게 하였다. 성종은 몸소 거처를 북쪽 서경(오늘날 평양)으로 옮기고 전세를 주시하고자 하였다. 소항덕의 거란군이 고려의 선봉부대를 봉산에서 격파하자 전세가 고려에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형국에서 고려 조정의 대신들은 거란군의 기세에 눌려 화친을 도모하기를 원하며, 심지어 그동안 통치했던 북쪽 서경(오늘날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고 까지 하였다. 성종도 조정대신들의 이 할지론(割地論)을 수용하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서경 창고에 있는 군량미를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남은 군량미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대동강에 던져버리라고 지시하였다. 이 상황에서 서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약하고 강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보아 군사를 움직이는 데 있다’고 역설하며, 싸워보지도 않고 서둘러 항복하자고 하는 조정대신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강변하였다. 이러한 때 마침 거란군이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고려의 중량장 대도수에게 패하는 상황이 되었다. 소항덕은 이 때를 즈음하여 조정대신과의 면담을 청하였다. 생명을 건 이 면담에 자원하여 나간 사람이 바로 서희였다. 서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의 진영 심층부에 들어가 적장 소항덕을 만났다. 그러나 적장은 신하의 예를 다하라며 서희를 압박하였다. 서희는 그의 요구에 강경히 맞섰으며 퇴각하면서까지 그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면담이 무산되는 듯 했고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소항덕이 자신의 의지를 굽힘으로써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역사적인 담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소항덕의 침입 동기는 고려 점령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고려가 일방적으로 송과 친교하면서 거란을 배척한 것에 대한 불만이 더 컸던 것으로 파악된다. 고려가 송과 화친하고 있는 한 거란이 송을 공격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외교적으로 고려를 설득하여 자신들과 화친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담판 중에 고려의 친송 외교와 북진정책에 대한 불만 등이 소항덕의 입을 통해서 나왔던 것이다.

소항덕의 이 주장을 통해 서희는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는 거란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며, 또한 고려가 송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에 대해 서희는 한 차원 위에서 화답하였다. 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당연히 현재 북쪽지역의 상당부분이 고려의 것이며, 우리가 거란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바로 국경지역의 여진족들이 통행을 방해하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고 응대하였다.

서희의 주장은 논리적이었고 타당한 것이었다. 결국 소항덕은 서희의 주장에 수긍하며 거란 황제에게 철군 승낙을 받아냈다. 이같이 서희의 외교적 수완으로 거란과 고려와의 첫 전쟁은 큰 싸움 없이 손쉽게 종결되었다. 거란이 순순히 물러난 것은 땅을 차지할 목적보다 고려가 자신들을 상국으로 대우해 주는 것에 일단 만족했기 때문이다.

또 “압록강유역의 땅을 고려에 넘겨준다면 여진족을 몰아내고 길을 내어 사신을 파견할 수 있다”고 한 부분도 소항덕의 마음을 움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에 틀림없다. 때는 11월 초로 계절은 겨울을 향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에 소항덕은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많은 군사와 함께 월동(越冬)의 부담도 있었기에 무조건 전쟁만 하는 것은 실리가 없다고 판단, 고려의 주장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압록강유역 강동6주를 넘겨주고 고려는 사신을 파견하는 것으로 합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거란은 군대를 물렸으며 고려는 오히려 북쪽 땅 강동6주를 차지하였다.

소항덕과의 담판으로 거란 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강동6주를 획득한 이 사건은 민족사적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고려충신인 이천 출신 서희 개인의 외교역량과 담력, 그리고 정확한 정세판단이 어우러진 결과라 할 수 있다. 고려 조정의 중신들이 지례 겁먹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화친과 할지(割地)의 주장이 대세를 이룰 때 서희는 때를 기다렸으며 담대히 적장을 만나 한판의 승부로 난국을 정면 돌파하였던 것이다.

담판이 끝나고 소항덕은 서희의 인품과 뛰어난 언변에 감복하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서 세치 혀로 적장을 설복시키고 대접까지 받은 서희는 거란군 진영에 들어간 지 7일 만에야 돌아왔다. 서희가 담판에 성공하여 귀환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종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강가까지 마중하러 나왔다.

그 후 서희는 자신이 획득한 강동6주 주변의 지역을 찾아 여진족을 평정하고 성곽을 수리 수축하였고, 애초 6주에 2성을 더하여 강동8성을 고려의 영역 안에 들어오게 하였다. 거란 침략 이후 서희는 국경지역에 자주 행차하며 그 지역을 평정하는 공무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활동으로 지친 서희는 병을 얻어 개국사(開國寺)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성종은 몸소 어의를 대동하여 서희를 문병하였으며, 어의 한 벌과 말 세필을 내렸고, 곡식 1,000석을 시주하여 서희의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거란이 물러간 후 강동6주 정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던 서희는 과로로 병을 얻어 결국 998년(목종 1) 7월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55세로 강동6주를 찾은 지 불과 5년 후였다. 고려조정에서는 장위의 호를 제수하였고, 필요한 모든 부의를 내려 주어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게 하였다. 서희의 묘소는 이천에 인접한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있는 후산에 마련되었으며 옆에는 부친 서필의 묘소가 있다.

그 후 서희는 1027년(현종 18) 성종 묘에 배향되었으며, 1033년(덕종 2)에는 태사의 직을 추증하였다. 이어 1392년 이성계는 고려 왕조를 끝내고 조선을 개국하였는데, 그 해 경기도 마전현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고려 왕실의 제향을 위해 숭의전을 건립하였으며, 서희도 이곳에 고려의 공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 1564년(명종 19)에는 이천읍 동쪽 5리 안흥지 옆에 삼현사(三賢祠)를 건립하였는데, 서희를 비롯하여 율정 이관의, 모재 김안국을 배향하고자 함이었다.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이천의 유생들이 제례를 행한다.

서희의 공훈을 논하자면, 담력과 정세를 꿰뚫어보는 통찰력 등으로 거란족을 물리친 부분을 우선 꼽을 수 있고, 또 하나는 거란 퇴치 후 강동6주를 비롯한 국경지역 평정을 들 수 있겠다. 하나 더 들자면 조정에 머무는 동안 보여준 충직과 강직의 모습이었다. 이 강직한 성품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983년(성종 2) 병관어사로 왕의 행차를 수행하여 서경에 갔는데, 왕이 남모르게 유희를 즐기러 영명사라는 절에 들리고자 했다. 이에 서희가 글로써 옳지 않음을 간언하고 만류하니 성종이 그 계획을 중지하고 오히려 말과 안장을 서희에게 상으로 내리고 내사시랑으로승진시켰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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