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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국 - 성리학을 몸소 실천한 은거 학자 상세보기 - 제목,내용,파일 정보 제공
제목 김안국 - 성리학을 몸소 실천한 은거 학자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아버지 김연1452~1494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천 출생은 아니지만 관직에서 퇴거한 이후 약 18년 이상을 이천과 여주에 머물며 이천 향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능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

김안국은 24세까지 수학修學하고, 25세부터 관직에 나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산부사·경상도관찰사·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
였으며, 1519년중종 14 파직되어 18년간을 야인으로 지내다가 다시 서용되어 약 5년간 관직에 몸담았다. 이에 따라 그의 생애를 흔히 4시기로 나누어 고찰하기도 하는데, 1기는 수학기라하여 1~24세까지, 2기는 환로기라 하여 25~41세까지, 3기는 퇴거기라 하여 42~59세까지, 4기는 재서용기라 하여 60~65세까지이다.

그가 관직에 있던 시절 많은 저술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경상도관찰사 재임기에 『소학』을 간행하고, 『이륜행실』을 편찬하였으며, 『여씨향약』과 『농잠서』 등을 언해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그리고 경상도의 66개 주와 현에 있는 향교 학생들이 『소학』을 공부하도록 권려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가 향촌교화와 성리학적 사회질서 정착을 위해 몸소 노력하였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좌이다.

그러나 김안국은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해 12월 16일 전라도관찰사에서 파직당한 후 주로 이천과 여주지역에 머물면서 시문을 짓거나 지역의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면서 살았다. 그의 퇴거생활은 40대에 시작하여 50대말에 이르기까지 약 18년의 세월이었으며, 왕성한 사회적 활동기로 볼 수 있다. 그의 문집 『모재집』에 실린 시가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였는데, 이는 퇴거기가 그의 생에서 또한 의미 있는 시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로 그의 퇴거생활 18년을 다시 나누면 이천 거주기간이 8년간으로 1520년부터 1527년까지이고, 여주 거주기간은 1528년에서 1537년까지 약 10년여의 기간이다.

그런데 김안국이 퇴거한 후 이천과 여주지역에 머물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고지도 아닌 곳에서 그렇게 긴 시간 머문 이유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우선 당시 교통상황으로 볼 때 남한강 줄기를 활용한 교통의 편리성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으로 본다. 또 많은 사류들이 남한강유역에 별서하고 있었는데 그들과의 손쉬운 교류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남한강 주변 이천·여주지역의 풍광이 수려하다는 점 또한 은거지역으로 선택한 이유일 것이다. 즉, 우거 사류들은 대부분 이처럼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거처를 선택하였으며 대개는 정자를 짓고 동학(同學)을 찾아내어 교류하였다. 김안국이 이천·여주와 관련을 맺게 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가 이천에 은거하면서 보여준 생활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경제적 형편은 『모재집』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그리 풍요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는 동리 사람들이 그에게 양식을 지원해 주었음을 알게 하는 사료가 있다. 또 물고기와 땔감 등은 이웃에 사는 노병들의 도움에 의해서 해결되었음도 기록에 보이고 있다. 그리고 여주에 머무는 동안에는 생업을 위해 직접 농사를 지었다고 하며, 양반들의 교유활동에서 상호 주고 받는 선물은 그들의 경제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안국의 퇴거기 활동모습은 그의 사류간의 교유양상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역시『 모재집』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직접 교류한 경우는 가족 친지의 방문, 사류들 간의 교류, 재지수령과의 교류 등이 있고, 간접적인 교류에는 시문의 주고받음, 묘도문자의 수증, 서찰의 교환 등이 확인되고 있다.

먼저 사류들 간의 일상적인 교류방식은 대부분 술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역시『 모재집』의 시문을 통해 확인된다. 이들의 모임은 대부분 시회의 성격을 갖는데 그중 ‘전춘’이니 ‘답청’이니 ‘칠석’이니 ‘중양절’이니 하는 것은 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로 이러한 절기에 모임이 많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재지사류들과의 수연이 있을 때 종종 함께하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여주 이포 우거시기에는 가끔 뱃놀이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안국이 퇴거 전에도 당대의 대가였으므로 퇴거 후 많은 사람들이 명정(名亭)이나 기문(記文)을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가 지은 많은 명정이 남아 있는데, 이 또한 교류의 증거로 볼 수 있겠다. 이 시기 재지사류간의 일상적인 교류범위는 보통 군·현 단위의 생활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대개는 거주하는 군현을 중심으로 인접한 서너 개의 군·현이 활동 범위였다. 이천·여주에 거처하는 동안 김안국이 외지로 나간 횟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비교적 원거리로 교통하는 경우는 대개 친족을 만나려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김안국의 학문은 당대에 꽤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동유사우록』을 살펴보면 그의 문인은 총 44명 정도 된다. 그가 관찰사 재임 시 향촌교화를 위하여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행동하였음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퇴거기에도 향촌교화를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주로 향음이나 향회에 참석하였다는 잦은 기록들이 이를 말해 준다. 그는 기회가 있으면 향음이나 향회에 반드시 참석하였다. 또한 향교나 역원의 중수기와 누정기를 적거나 가요를 지어 성리학의 보급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중 이천지역에 관련된 사례로는 퇴거 2년째에 지은 「이천중수향교기」, 퇴거 4년째 지은 「애련루기」, 퇴거 6년째 지은 「이천교생가요」가 있다. 특히 「이천중수향교기」가 눈에 띄는데, 조선시대 관립학교인 이천향교를 중수할 때 쓰인 이 내용 중 주목되는 곳은, “교학을 일으키는 한 가지 일은 왕정의 대단(大端)이다” 라고 한 부분이다. 즉, 이는 교학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그는 평상시에도 이렇듯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유생들이라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한편, 돌아간 모친을 위해 3년간 여묘 살이에 사당을 지어 단청까지 하고 삭망에 제사를 모셔서 향당의 칭찬이 자자한 공번좌라는 민간 노비가 있었는데, 당시 공번좌가 거주한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이천이나 여주 어디였을 것으로 본다. 김안국은 이를 칭송하여 “이러한 순효(純孝)는 사대부로도 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천예로서야 가당키나 하겠는가?”라고 하여 그를 칭송하는 글을 부채에 써주었다고 한다. 유교의 덕목을 실천함에 충실한 사람이라 여겨지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칭송하는 그의 품성이 돋보인다. 어쨌든 그는 퇴거기에 이 정도로 향촌 교화에 힘쓰고 있었다.

여주 이포 퇴거기에는 수태지(水苔紙)라는 새로운 종이를 만들어 스스로 주위 사람들에게 권유하였으며, 후일 다시 서용되었을 때 이를 진상하여 각 도에 보급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일상의 삶속에서 배움을 실천하는 자세가 돋보인다. 김안국이 이천 향당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임은 앞의 내용으로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산수유마을로 유명한 백사면 도립리에 있는 육괴정을 중심으로 한 그의 활동을 통해서 뚜렷이 확인된다.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천지역의 사류들은 김안국을 비롯하여 성담령, 강은, 엄용순, 오경, 임내신 등 총 여섯 명을 괴정육현이라 불린다. 육괴정은 도립리가 고향인 엄용순이 지은 정자(亭子)로 김안국이 자신의 학문의 보급과 유학자로서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한 곳이다. 또 퇴거의 긴 공백기간의 외로움을 달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육괴정에서 교유한 인물들은 표와 같이 여섯 명에 이른다. 1519년(중종 14) 발생한 기묘사화 때에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지도자들이 대부분 죽음을 당했지만 때마침 전라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가있던 김안국은 큰 화를 면하고 파직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으며, 파직 이듬해인 1520년 이천 주촌에 내려가 작은 정자를 짓고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육괴정을 지은 엄용순 또한 기묘사화로 인해 낙향한 인물이다. 이 육괴정에 함께한 인사들은 시회를 열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니 이들을 괴정6현이라 불렀다.

김안국이 이천 주촌에만 8년 정도 거주하다 1528년에 여주 이포로 옮겼는데, 그가 지은 『모재집』에는 주촌에 있는 동안 주고받은 많은 시와 문장이 실려 있고, 이포에 거주할 때도 이천에 자주 왕래하며 교유하였음이 드러난다. 그는 안일하게 자신의 안락만을 추구하지 않고 향촌의 대소사에 참여하는 성의를 보였다. 또한 농사일을 담당하면서 이삭을 손수 줍고 경작한 곡식들을 저장했다가 보릿고개에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주기도 하였다.

그가 은거생활을 청산하고 벼슬길에 다시 나아간 것은 1537년(중종 32)으로 20여 년만의 일이다. 그는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 병조판서로 있을 때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와 닥나무를 화합한 태지(苔紙)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그 제조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학문을 통해 익힌 성리학적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시키려 평생 노력했으나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온건과 실용성을 늘 견지했기에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후세에 비평이 따르기도 했다. 근면 성실한 성품으로 매사 정밀하여 관직에 있을 때 많은 일화를 남겼으니, 특히 과거의 사관 역할을 맡았을 때는 채점이 공정하고 세밀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김인후·유희춘등 많은 후학들을 길러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사후 인종 묘정에 배향되고, 이천 설봉서원과 여주 기천서원, 의성 방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 시민을 위한 이천시지 제 1권 159~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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