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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의 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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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동산리 마애여래상
승승천을 기다리고 있는 나무, 반룡송(蟠龍松)
  • 지정일 : 1986. 4. 14
  • 소재지 : 이천시 호법면 동산리 산121
  • 지정번호 : 이천시 향토유적 제9호
  • 재료 : 화강암
  • 규모 : 높이 203㎝, 폭 79 - 91㎝, 두께 15 - 20㎝
  • 시대 :고려초기 ~ 중기

동산리(東山里) 마을 남서쪽 대덕산(大德山) 기슭에 위치해 있다. 불상(佛像)은 화강암 자연석을 깎아 높이 203㎝, 폭 79 - 91㎝, 두께 15 - 20㎝의 좌경(左頃) 장방형 판석(板石)을 세우고, 그 전면에 세련되고 유연한 조각(彫刻) 솜씨로 여래(如來)의 입상(立像)을 1㎝ 깊이로 선각(線刻)해 놓았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육계(肉계)가 높직하고, 상호(相好)는 둥글고 원만하나 코 부위는 약간 마멸되어 있다. 큰 귀는 양 어깨에까지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은 통견의(通肩衣)로서 의문(衣文)은 사선(斜線) 또는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려 선각해 놓았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마주 댄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구품인(九品印)중에 상품중생(上品中生)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한편 왼손은 엄지를 구부린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불우조(佛宇條)에는 “입석사재호법리대덕산(立石寺在戶法里大德山)”이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 산중에 입석사(立石寺)가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불상에서 서쪽으로 입석(立石)재 고개란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보아, 이 모두가 여래상(如來像)이 새겨진 바위 곧, 입석(立石)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불상(佛像)의 현 위치가 원래의 위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성년대(造成年代)는 대체로 고려초기~중기로 추정된다.
충숙공 박난영 정려각(忠潚公 朴蘭英)과 사당
충숙공 박난영 정려각(忠潚公 朴蘭英)과 사당

호법면 매곡1리 소학산 자락(안돈의실, 안말)에 위치해 있다.
숙종원년인 1675년에 영의정에 추증되면 서 정려의 은전이 내려졌는데,
이 당시 건립된 것이나 이후 여러차례 중건되었으며, 지금의 정려각의 건립연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충속공 박난영[忠潚公 朴蘭英](1575~1636)
충속공 박난영[忠潚公 朴蘭英](1575~1636)

충숙공은 조선 중기의 무인(武人)으로 본관(本貫)은 고령이며 자(字)는 형백(馨伯), 휘(諱)는 난영(蘭英) 이다. 선조(宣祖) 1575년에 태어나 62세때 참형(慘刑)을 받아 청나라 진영에서 순국하였으며, 이천시 호법면 매곡리 돈의실(遯義室)에 묘가 있다 그는 인조(仁祖) 초 후금과의 관계가 복잡할 때 회답관, 선위사, 춘추신사 등으로 활약했다. 심양을 왕래하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청장 마부대 용골대 등과 휴전 교섭을 했다.이때 조정에서는 청(淸)나라와 화의하기 위하여 능봉군(綾峯君)과 심집 (沈輯)을 왕자(王子)와 대신(大臣)으로 변장시켜 보냈다.

이때 청나라의 진영에서는 서기 1617년 10월 강홍립(姜弘立) 도원수를 따라 명(明)나라 원병으로 출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머물러 있던 박난영에게 이들이 정말로 왕자와 대신이냐고 물었다. 이때 박공은 왕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사실이라고 말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박난영의 말을 믿으려 했으나, 병자호란시 통역관으로 만행을 저지른 정명수가 주장하기를, "거짓말 같으니 조선에 다시 확인하여 보자."하였다. 그리하여 거짓이 탄로나 청(淸)이 대노하면서도 비록 적국의 신하이지만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살고져 하면 그대로 앉아있고 죽고져 하면 일어나라"하니 공이 혼연이 일어나는지라 역관이 하도 딱하여 울며 청하기를 한마디 말이라도 "호(胡)를 대접해 주면 후일을 기약할수 있다"하니 공이 분연이 꾸짖어 말하기를 "군왕(君王)께서 곤욕을 받으면 신하된 사람은 죽음으로 막을 뿐이다. 어찌 살길만을 도모하랴"라고 했다. 남한산성 쪽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의젓이 참형(慘刑)을 받아 최후를 마치니 향년(享年) 62세였다. 공의 위대한 훈공은 법의 절차에 따라 보국숭록대부령돈영부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로 특증 (特贈)되었고 나라에서 예절을 갖추어 제사 지냈으며 돌아간 다음해 이천 호법 돈의곡 (遯義谷:매곡1리) 선산에 장례를 모셨다. 그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숙종(肅宗) 을묘년(1675)에는 왕명으로 충신 정려(旌閭)를 고향 이천 돈의곡에 세웠으며 고종임금때 시호가 내리니 난불망국왈충 집심결단왈숙 (亂不忘國曰忠 執心決斷曰肅)이라해서 충숙(忠肅)으로 하였다
박난영사당(朴蘭英祠堂)
박난영사당(朴蘭英祠堂)

충숙공 박난영의 사당은 호법면 매곡1리 부락 상단에 정려각과 나란히 있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박난영의 위패를 안치했다. 처음에는 부락 앞쪽에 세워져 있었으나 누차 이전과 중수를 거쳐 현 위치에 새로 건립하여 놓았다. 지금의 사당은 산기슭에 남향으로 위치하여 평지보다 높게 축조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맞배지붕에 방풍판을 달았다. 외삼문 대산 일반가옥의 대문을 달았으며, 시멘트블록으로 곡담을 둘러 외부로부터 보호하였다. 사당 중앙에 화강석으로 보도를 놓았고, 바닥은 콘크리트로 처리하였다. 사당 중앙에 화강석으로 보도를 놓았고, 본래 사당안에 장검과 갑주등 고인의 유품이 보관되어 왔으나 6.25 동란을 거치며 모두 분실되고 칼집만 보관되어 있다. 충숙공과 정경부인 문화유씨의 제향은 매년 음력 4월 28일과 12월 28일에 지내며, 정월에 차례를 올린다.

*자료출처 : 이천시 문화유적, 민속조사보고서(호법면편, 2001.4)

동산리 단내성지
동산리 단내성지

단천리 357번지에 위치한 단내성지는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다섯분, 곧 단내성지 건너 마을인 동산리에서 태어나신 이문우 요한(1810~1840)성인을 비롯하여 남이관 세바스티아노(1780~1839), 조중이 바르바라(1782~1839), 부부성인 이소사 아가타(1784~1839), 이호영 베드로(1803~1838) 남매성인 등 5위의 순교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단내에서 출생한 정은 바오로(1804~1866)와 정 베드로(?~1866)는 병인박해때 순교하셨다. 당시 63세였던 정은 바오로는 늙고 병들어 쇠약한 몸으로 1866년 12월 2일레 단내에서 체포되어 당시 유수부가 있던 남한산성에 수감되었다.

통나무로 허름하게 지은 임시 감옥에서 추위와 굶주림, 태형의 고통에 시달리며, 25일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12월 27일에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붙여서 죽이는,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셨다. 정은 바오로의 조카손자였던 정 베드로는 평소에 존경하던 작은 할아버지가 쇠약한 몸으로 체포되어 가시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의 옥바라지을 해드리고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하고, 관청을 찾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체포되어, 함께 수감생활을 하다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백지사형으로 순교하셨다. 두 분이 순교하신 후 정은 바오로의 두 아들인 일동과 수동 형제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밤을 이용하여 남한산성의 처형 터로 가,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서 단내성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 베드로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단내성지를 성역화하면서 2000년 4월 11일에 할아버지 곁에 함께 하려 했던 정 베드로 순교자의 염원을 받들어 순교 터인 남한산성 동문 밖의 흙을 채취하여 정은 바오로 순교자의 묘옆에 정 베드로 순교자의 묘를 조성했다.
와룡산의 건들바위(검은바위)
와룡산의 건들바위(검은바위)

이천시 문화유적,민속조사보고서(호법면편)에 의하면 건들바위에 관한 네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단천리 뒷산(와룡산)에는 건들바위라고 하여 큰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는 이무기가 살았었는데, 어느 날 그곳에 구름이 빽빽이 끼더니 그 바우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되어 승천하려고 했다. 마침 그 광경을 보던 한 여자가 “용 올라간다!”라고 크게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고는 용이 되어 올라가지 못하게 된 이무기가 노하여 벼락을 쏘았다. 벼락이 건들바위에 맞아 부서져서 지금은 조그마한 바위로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단내에서 옥수암 가는 옛산길에 있으며 그 바위에는 십여명이 앉아 놀 수 있었다. 의자바위에 앉아 앞에 책같이 생긴 바위를 앞뒤로 당겼다 놓았다 하면 건들거린다고 한다

이천군향토문화자료총람-전설편 기록에 의하면 호법면 단천1리 뒷산에 있으며 원래는 지금의 높이보다 훨씬 더 높은 바위였다고 한다. 어느날 용이 그곳에서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근처에 있던 애기 밴 아낙네가 보아버렸다. 그때 용이 노하여 벼락을 내려 바위를 부쉈다고 하며 근처에는 많은 바위조각들이 깔려 있다고 한다.

옛날 어느날 아침 안개 속으로 용이 올라가는 것을 임신한 여자가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지면서 이 바위에 부딛쳤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보다 더 컷던 바위가 현재와 같은 크기로 깨졌다고 한다. 이 바위의 중간부분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이 부분에 앉아 있으면 건들건들 거렸다고 하여 건들바위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와룡산의 건들바위(검은바위)
검은바위 전경 - 처음 바위를 보면 바위의 규모에 조금은 놀란다. 와룡산이 그리 높지 않은 산이며,
이천지역이 강원도 지역처럼 기암괴석과 바위가 흔치않은 지역이기 때문이다. 바위 왼쪽의 성모상과 이를 감싸고 있는 바위조형물, 검은바위 안내판은 2000년대초중반 단내성지관리소에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검은바위
이 '건들바위'를 '검은바위'라고 하는데 바위색 때문인지, 음이 변화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건들바위는 천주교 박해와 단내성지 순례코스로 유명하다. 1866년 병인박해때 포졸들이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망을 보았는데,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뒤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됐고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한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곳으로 요즘은 마을사람들보다 단내성지 순례자들에게 더욱더 알려진 바위로 남아 있다.
동부권광역자원회수시설
동부권광역자원회수시설

이천시 호법면 안평리(안평3리) 산98번지 일원에 위치하며 시설단지 규모가 114,644㎡에 달한다.

3년여의 기간을 거쳐 2008.11.20에 준공하였으며 부대시설로 소공원과 '이천스포츠센터'가 들어서있다. 이천, 광주, 하남, 여주, 양평 등 경기도 동부권 5개 시군의 쓰레기를 처리하고 있다.

이천스포츠센터
이천스포츠센터

이천시 호법면 안평리(안평3리) 산98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동부권광역자원회수시설의 부대시설이다. 수영장, 축구장, 테니스장, 헬스장 등 각종 스포츠시설이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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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632-9001
최종수정일:
2018.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