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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

효양산
효양산

산이천시에서 동남간으로 구만리 벌판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복하천이 흐르고 있다. 산기슭 양편으로 마을이 있어 앞쪽은 부발읍 마암리, 뒤쪽은 산촌리 이며, 서쪽으로는 OB맥주 이천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효양산은 해발 178m의 작은규모의 산이나 산중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지, 서씨 시조묘등의 유적과 효양산 금송아지 이야기, 사슴의 보은에 얽힌 이야기등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산이다. 효양산은 일명 수양산으로 부르기도 하며 효양산에 대한 명칭에 대한 유래는 옛날 부모에 대한 효심이 뛰어난 효자 한사람이 이 산중에 살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이 저 산이 뛰어난 효자를 키워냈다 하여 효양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효양산 토성은 산 능선을 경계로 하여 내촌리쪽 넓은 평원을 둘러싸고 축조 되었는데 최근 단국대학교 고적 조사단이 실시한 조사결과 삼국시대말 신라군이 쌓은 신라 토성지로 밝혀졌다.

산 동쪽 산록에 있는 서씨 시조묘는 고려성종때 거란의 침략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 선생의 할아버지인 서신일의 묘 로서, 신일은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들어와 은거 하던중 어느날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구해주고 나이 80에 아들을 얻어 그후 자손들이 크게 번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고려태조가 남정할 때 길을 인도하여 복하천을 무사히 건너게 한 공으로 이 땅에 이천이라는 이름을 내리게 했던 서목은 바로 효양산에 살던 서씨의 일족으로서 신일의 조카가 된다. 산중에는 은선사, 약사암 등의 암자가 있으나 모두 근래에 창건된 절이며, 산 동남쪽으로 산촌리 부락 상단에는 조선개국 공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한산부원군 조영무의 사당인 효산사가 있다. 효양산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이 금송아지의 전설인데 이 산중에 있다는 금송아지를 찾아 옛날 중국의 사신이 이곳으로 향해 오다가 한 선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되돌아가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효양산을 둘러싼 이천의 대표적인 전설이기도 하다.

현재는 등산로가 정비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입구는 무촌리 군부대앞 방면과 신하리 방면이 있다.
산촌리 서씨 시조묘

묘효양산 남쪽 산록에 있는데 행정 구역상으로는 부발읍 산촌리가 된다. 거란의 침략을 적장 소손녕과의 단판으로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구한 서희선생의 할아버지이며 이천서씨를 비롯한 다른 서씨들의 시조인 서신일의 묘인데, 이천을 본으로 하는 성씨는 이 이천서씨가 유일한 성씨이다.


서신일은 신라 조정에서 아간대부라는 벼슬에 있었는데, 신라가 망하자 동생 서신통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효양산 속으로 들어와 은거하며, 후진을 가르치기에 힘썼다고 한다. 서신일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그가 나이 80이 되도록 자손이 없어 걱정하던 중 하루는 수하사람들과 더불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사슴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쫓겨 뛰어들기에 이 사슴을 풀더미 속에 감추어 숨겨주었더니, 그날밤 꿈속에서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낮에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당신 덕분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그 은공을 갚겠다』고 사라지는 꿈을 꾸고나서, 나이 80이 넘어 소망하던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또 백발노인이 일러준대로 지금 이 자리에 묘를 씀으로써 그 자손들이 크게 현달하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니, 아들 필 은 벼슬이 대광내의령에 이르고 시호는 정민공으로 광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손자 희는 태보내사령에 시호는 장절공으로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증손 눌은 벼슬이 삼중대광내사령에 이르고, 시호는 원숙공으로 이천부원군에 봉해져 정종 묘정에 배향되는 등 일족이 크게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서신일의 동생인 서신통의 아들 서목은 남정 하는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복하천을 무사히 건너게 함으로써 이 고을에 이천이라는 이름을 내리게 한 장본인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평장사 서공, 대사성 서강, 판사 서선, 등도 그의 후손들이다. 높이 약 65㎝ 가량의 특이한 형태인 오래된 석인 한 쌍이 묘 좌우로 있고, 흰색 대리석으로 된 묘비와 망주석 등 상석 등은 근래에 와서 후손들이 세워놓은 것이다. 산촌리 부락상단에는 당시의 국무총리 최두선이 글을 짓고, 서예가 김충현이 글씨를 쓴 서거사신도비가 있다.

효양산 황금송아지 이야기
백족산 무량사 사진
때는 삼국시대로 신라는 진덕여왕이 김춘추에게 왕위를 물려 줄 즈음이고, 백제는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성군(聖君) 소리를 들었던 즉위 초였으며, 고구려는 연개소문 병사(病死)후 그의 아들들이 권력투쟁에 들어간 보장왕 시절이다. 한편 그 무렵 중국은 유약한‘당(唐)나라 고종황제가 통치하던 시기다. 진흥왕 이후 한강유역권의 각축장을 장악한 신라는 효양산에서 캐낸 금으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순풍조를 기원하는 제사를 해마다 지내게 되었는데 그의 효험인지 국력이 계속 신장되어 그 제대를 더 북쪽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제기로 사용하던 황금송아지의 처리를 두고 대신간의 의견이 분분 하였다. 이에 진덕여왕은 어전회의를 통하여 한수이북 당항성 부근으로

옮기기로 하였으나, 홀연히 백발도사가 나타나 그곳은 위험하니 남천주 효양산에 묻어 두라고 경고하고 사라진다. 그날 밤 여왕의 꿈에 낮의 그 백발도인이 다시 나타나 황금송아지를 남천주에 반드시 묻고 근방의 지명이름을 알려주는 대로 바꾸라고 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백발노인이 일러주는 대로 대신들에게 지시하여 금송아지를 남천주에 묻고 지명이름을 바꾼다. 한편, 당나라 황실에서 황제의 세숫대야에 황금송아지가 비쳤다는 기이한 현상에 대신들이 모여들고 주역을 관장하는 이가 풀이하길 이는 신라 남천주 효양산에 묻혀 있는 황금송아지로 이를 그냥 놔두면 고구려보다 더 강성한 나라가 되어 중원을 침범할 것이라고 한다.

황제가 해결책을 묻자 그는 밀사를 파견하여 이를 탈취해 와야 한다고 하자 황제는 즉각 밀사를 잠입시키라고 하명한다. 황제의 명을 받은 밀사는 고구려를 통한 육로를 피하여 당항성으로 잠입한다. 효양산신인 백발도인은 이러한 정황을 훤히 내다보고 밀사가 오는 길목(지금의 용인시 내사면 양지)에서 밀사를 기다린다. 밀사가 다가오자 백발노인이 말을 건다. 밀사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오히려 노인에게 효양산에 대한 정탐을 한다.

이때 노인이 말하길 자신은 남천주 효양산에서 오는 길인데 지팡이를 보여주면 서 이렇게 닳았다면서 효양산의 금송아지가 하루에 세 번 뛰어 논다는 말까지 하여 밀사를 안심시키고 다음 얘기를 이어간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제일역이 나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오천(五千)역이 나오고 그 오천 역을 지나면 억만 리 (億萬里)가 나옵니다. 그 억만 리를 다 지나면 다시 이천(二千)역이 나옵니다.

그 이천 역을 지나면 억억다리〔億億橋〕가 나옵니다. 그 억억다리를 지나면 구만리(九萬里) 뜰이 나옵니다. 그리고 효양산입니다. 허허허!”이 말에 당 밀사가 탄식을 한다. ‘아! 언제 오천 개의 역을 지나고 억만 개의 마을을 지나, 다시 이천 개의 역을 지나, 일억 개의 다리와 구만리나 되는 뜰을 지나서 효양산을 간단 말인가.? 저 노인의 지팡이가 저렇게 닳았다면... 거짓이 아니구나. 이거 낭패로다.’ 당나라 밀사는 노쇠하게 늙어버린 채 귀국하는 모습과 근심어린 노부모와 처자식의 얼굴이 어른 거렸다.

밀사는 결국 포기를 하고 방향을 바꿔 오던 길로 되돌아 갔다. 여기서 도인과 그 밀사가 대화를 나눈 지점은 효양산과의 거리가 국도 42호선상에서 불과 20여 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은 곳이었다. 즉 밀사는 효양산에 거의 다 와서 되돌아간 셈이며 황금송아지를 지키려던 백발도인의 땀을 쥐게 하는 지략이 돋보인 것이다. 오천 역, 억만 리, 이천 역, 억억 다리, 구만리 뜰은 모두 고유지명으로, 오천 역은 이천시 마장면 소재지 이름이고, 억만리는 자연부락명이‘억만이’로 그저 한 개의 마을 일 뿐이었다. 또 억억다리는 1억 개가 아니고 다리 이름이(橋名)이‘억억교’일뿐이었다. ‘구만리 뜰’도 효양산과 시내 사이의 지금 미란다 호텔에서 복하천 사이의 평야지대로 사방 시오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이 모두가 명칭을 바꾸자는 백발도인의 계략일 뿐이었다. 국가의 흥망성쇠의 기운을 지녔다는‘효양산 황금송아지’를 지키려는 도인의 지략과, 그 황금송아지를 통해 국운 발복을 지키려한 국가적 책략에서 지역의 위상을 드높이려 한 구전의 전설이다.

효양산 은선사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효양산 남쪽 산록, 부발읍 산촌리 332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은선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조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영주에 있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이어서 이천지방에 十六寺를 창건했는데, 설봉산 영월암과 함께 그 때 창건된 十六寺 중 하나가 이 절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절이 화엄종 10대 사찰을 비롯하여 전국에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보면 역시 근거가 희박한 이야기다. 또 효양산 중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의 묘와 관련하여 신라가 망하자 이 산 속에 은거한 서거사가 지은 절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임진외란 때 왜군들에 의해 불타버린 후 문인식이란 사람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하며, 6.25 사변의 병화로 다시 불타버린 것을 1979년 봄 주지 김영규가 대웅전을 신축하여 옛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창건 당시 봉안했다는 석불 1위를 6·25 당시 부근에 사는 신도들이 포격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묻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산촌리 효산사
효양산 남쪽 산기슭 부발읍 산촌리 부락 상단에 있으며 조선 개국공신이며 태종때 상신인 충무공 조영무의 사당이다. 조영무는 본관이 한양으로 한산 백세진의 아들로 태어나 무장으로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에 공을 세웠다. 방원의 명을 받고 조영규 등과 더불어 절의를 굽히지 않던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하는데 참여했으며, 왕자들의 세력다툼인 1차와 2왕자들의 난 때에도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1405년에 우의정을 지내고 1408년 한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414년에 사망하여 태종묘에 배향되었다. 사당의 건립연대는 미상이며, 수차례의 중건을 거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수가 없다. 사당안에는 폭 97㎝, 길이 170㎝의 조영무의 초상화를 안치했는데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별묘에 있는 영정을 모사한 것이라 한다.
청암 관광농원
  • 소재지 : 이천시 부발읍 아미2리 산 20번지
  • 대표자 : 박 진 규
  • 일반현황 청암관강농원은 부발읍 아미2리에 위치하여, 약 2만여평의 부지에 여름 에는 수영장, 겨울에는
    눈썰매장 등의 위락시설이 있으며, 과수단지 농 원과 중앙의 호수, 100여종이 넘는 수목등으로 어우러진
    정원은 훌륭한 위락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년중 많은 학교나 직장등의 단체에서 연수 및 MT장소로 활용하고 있 으며, ‘98년에는 농림부에서 최우수 관광농원으로 선정 하기도 하였다.
  • 시설물 한식 연회장(120평), 숙박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운동장
  • 찾아오시는 길 이천시내에서 여주방면 42번국도중 부발읍 시가지 진입전 3901부대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안내표시판 따라 약 2㎞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
  • 문의처 : (031)632-5082 / 634-7882, hp 011-729-7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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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8.01.16